만원의 행복

3, 4집 활동할 때는 국제 장돌뱅이 노릇 하느라 활동하는 동안 우연히 라도 티비에서 본 적이 없다. 지금은 없어진 인천공항 대형서점 근처에서 크게 틀어놓은 올빼미를 스치듯이 듣는데 근처에 서 있던 외국인 하나가 거기에 맞춰 들썩들썩하는 걸 보고 그래 제대로 따라쟁이지? 하고 냉소적으로 지나쳤던 기억이 난다. 은지원 열심히 살았는데 나는 왜 그리 성에 안차는 게 많았을까.

지난 활동 기간 동안 출연한 프로그램 중 음악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가장 마음에 남는 프로그램이 만원의 행복이다. 얼마 전에도 에픽하이 편에 잠깐 나온다고 해서 챙겨본 적이 있는데 참 똑똑한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이 가지고 있는 틀과 출연자의 개성을 조합하는 황금률을 지키면서 지루하지 않게 이끌어가는 힘이 있다. 은지원이 출연한 게 벌써 2년전인데 그때만도 벌써 나올 사람은 다 나오지 않았냐고 했는데 아직 살아남은 걸 보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음악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별로 관심 없는 에픽하이 편도 나름 흥미를 가지고 볼 수 있었고 그 사람들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호감도 생겼다. 아무래도 스튜디오에서 얼굴 없는 대중을 향해 메아리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 보다는 눈 앞에 있는 VJ에게 하는 이야기가 누구라도 더 수월하고 편하겠지. 특히 은지원은 그게 다른 연예인보다 심한 것 같다. 예능인 은지원이 빛을 발한 게 하루종일 카메라가 돌아가는 1박2일인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출연진이 매번 바뀌고 30초만에 개인기를 해야하는 20세기 쇼 프로그램에서 유난히 어눌해 보이던 것도 아직도 축제에서 멘트가 어색한 것도 대상이 일반 대중일 때니까. 돈 내고 공연 보러오는 사람이나 팬과는 다른 일반 대중 앞에서 아직도 자신 없어 보일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1박2일 밖에서도 1박을 외치고 나이트에서도 잠안자고 열심히 하겠다는 얘기 말고는 딱히 할 말이 없겠지. 진부한 얘기지만 항상 자기 앞의 관중을 처음 만난다고 생각하고 누구든 반하게 하고 말테다하는 소년만화 같은 마음 가짐을 가졌으면 하는 팬으로서 안전한 1박2일의 벽 뒤에 숨는 것 같아서 좀 아쉽다.

은지원과 타이푼, 매니저, PD 남자 넷이서 차에 타서 노홍철이 남긴 노트를 소리내 읽으며 떠드는 것, 경쟁자인 안선영과의 어이없는 전화 통화 후 코디에게 타박 듣는 은지원, 옆에 앉아서 자기 얘기하는 걸 듣다가 불쑥 목을 조르는 동갑내기 친구, 따뜻하게 바라보면서도 문득 아 저 사람 가수지 하고 깨닫게 해주는 공연 장면. 모두 고맙기만 하다.

몰랐는데 이즈음 은지원 얼굴은 참 낯설다. 갑자기 어려진 얼굴이 그 자신의 5년 전으로 돌아간 게 아니라, 시간을 여행해 또다른 5년 전 얼굴을 만든 것 같이 비현실적이다. 며칠 간에 걸쳐 찍는 거라 어떤 옷 입고 나왔나 인형놀이 하듯이 시작한 캡처인데 종종 너무 낯선 얼굴에 흠칫 놀라곤 했다. PD랑 원래 아는 사이였나 카메라를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다정해서 무방비해서 달콤한 착각에 빠진다. 조수석에 앉아 대시보드에 얹은 양말 신은 발, 요즘 내 플랭카드도 많지 않은데 하던 사인회, 한밤의 고속도로 휴게실, 그리고 이제는 가고 없는 싹싹한 후배가수 유니.

라디오에서 무심결에 만원의 행복 촬영 중이라고 말하고는 깜짝 놀라는 얼굴 위로 '깜짝 놀라는 거 봐'하는 PD 목소리, 1박2일에서도 숨어서 고구마 먹을 때 촬영 감독이 끅끅 웃는 소리가 그렇게 좋더라 난. 하루종일 쫓아다니는 카메라 속에서는 스튜디오처럼 선명하지 않아도 작은 표정 하나 하나가 홈 비디오 속의 내 가족처럼 그래 내가 알지하는 맘이 찍는 사람을 통해서 전해진다.


미국 프로 야구팀 숫자만큼 있는 것 같은 모자들, 교복 입은 여학생부터 아기 안고 온 엄마까지 충직한 골수팬들, 타이푼, 매니저, 코디, 백댄서, 은지원이 먹여살릴 사람 참 많구나 싶었더랬지.

by 라임콕 | 2008/06/14 18:29 | 그냥은지원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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