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체 은지원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나는 미친 듯이 좋은 것보다는 미친 듯이 견딜 수 없는 것이 많아졌다. 좋게 말하면 취향이 확고해졌고 나쁘게 말하면 그저 까탈만 늘었다. 나만의 기준으로 칼같이 세밀한 완성도의 계층을 만들어 모든 것을 칸칸이 구분해 집어넣었고 그 맨 아래 서랍은 끝도 없이 높아만 갔다. 어린 시절 단 한 사람으로 제크의 콩나무처럼 아득하게 자라난 은지원은, 나의 세계가 넓어지면서 늘어난 수많은 사람 중 하나가 되어 점점 그 설 자리가 좁아졌다. 원채 비정상적으로 커다랬던 만큼 그 군더더기를 쳐내는 데는 망설임도 아쉬움도 없어서, 영화배우 은지원을 쳐내고 예능인 은지원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수 은지원을 쳐낼 때 즈음엔 그 내리막에 엄청난 가속도가 붙어 비현실적일만큼 무감각해졌다.

이제 남은 건 얼굴과 몸, 목소리. 지금 추세로는 곧 얼굴과 몸도 쳐내고 목소리만 남는데, 배우가 아름다운 외모로 부족한 연기력을 용서받을 수 있는 유예기간이 있는 것처럼 은지원에게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만큼 내 취향에 맞는 목소리가 지금껏 성에 차지 않는 부분을 메꿔주고 있다. 뭐 설마 목소리야 변하겠어?

번외로는

집안의 기둥은 커녕 크게 헐어먹지만 않으면 되는 고만고만한 부잣집 막내 아들의 여유(실속은 이쪽이 이건희 아들보다 백배 낫다), 상냥하지만 담백한 성격, 붉으락푸르락하는 사람에다가 대고 '그럼 도대체 어쩌란 거야'할 줄 아는 직설화법, 해결할 수 없는 일은 고민하지 않는 간결함,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솔직함, 현재에 충실한 건전한 쾌락주의,

물론 그 뒤편에는 애초에 포기한 가부장적 가치관, 가끔 보이는 권위의식, (경제력처럼 얄팍한 게 아니라 더 무서운)가진 것 없는 자에 야박한 상상력 결핍, 한계까지 늘어뜨린 기준에도 못 미치는 도덕성/시민의식, 할 줄 몰라 나 몰라라 하는 근성, 외모가 재능인데 가꾸지 않는 무심함(농담 아니고 진지하다),

레고 블럭처럼 이리저리 조립하고 있는 은지원의 자세, 태도. 얼마만큼 진짜인지는 안친한데 당연히 모르지. 고칠 점이야 많지만 어쩌겠어 내가 데리고 살 것도 아닌데. 혈연, 지연으로 어설프게 엮여서 정치유세하는데 기웃거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그냥 지금까지는 플러스 마이너스 합산해서 가까스로 플러스. 완전체 은지원은 어차피 환상.

by 라임콕 | 2008/07/07 09:50 | 은지원 | 트랙백 | 덧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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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그냥 행인 at 2008/07/07 22:44
안녕하세요. 저 밑에 '나의 상상 속의 친구'라는 표현이 너무나 공감이 가서 글까지 남겨버립니다.
과거 환상 속의 완전체 은지원, 나의 우상 은지원에서, 어느덧 플러스 마이너스 합산해서 그래도 괜찮은 구석이 많은 놈, 나의 상상 속 친구가 되어버린 것 같아요. 단점까지 다 알아버린 10년지기 친구를 그래도 괜찮은 놈이라고 좋아하는 것처럼... 간혹 놀러오게 될 것 같아요. 아마 눈팅만 할 가능성이 크지만요.
Commented by 라임콕 at 2008/07/07 23:12
말 그대로 상상 속의 친구라, 혼자서 인연을 끊었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그럽니다. 인생에 나름 큰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이라 같이 상상 속의 사진 찍는 기분이네요. 그 속에 지금의 나도 있고 지금의 은지원도 있고 그런 거죠. 많이 어수선할텐데 그냥 보고 싶은 만큼만 좋은 만큼만 잘 골라보세요(이건 뭐 호객행위도 아니고;).
Commented by roskthsk at 2008/07/08 09:19
완전체 은지원은 어차피 환상.2222 라임콕님은 저에게 있어 무릎팍도사와 같은 존재이시네요~ 그냥 한줄요약으로 명쾌한 해답을 주시니 말이죠.. 답답한 날씨와 답답한 저의 가슴속에 글로 시원하게 해주시네요~ 잘 읽고 갑니다~
Commented by 라임콕 at 2008/07/08 14:47
은지원팬 십년이면 누구나 도를 닦는 겁니다. 날씨 참 덥죠...
Commented by 지구인 at 2008/07/08 13:02
안녕하세요~ 오늘 어떻게 하다보니 여기까지 와서 라임콕님 포스팅을 찬찬히 보고 있는 중입니다.(아직 1/10도 못봤지만요) 점점 뚱지원이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에 맘 아파하면서 라임콕님 포스팅 중에 와 닿는 말이 있었지요. 갑자기가 아니라 매번 꾸준히 불어가고 있는 걸 보는 참담한 심정이요...
전 은지원이 팬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그에 대한 모든 말이 다 신선하고 보고로 받아들여집니다. 멋진 포스팅 기대할게요~ (그리고 전 덧글을 잘 남기는 편인지라 가끔 신세지겠습니다 ^^)
Commented by 라임콕 at 2008/07/08 14:53
신생팬 접할 때마다 1박2일 처음 촬영온 VJ 보는 호동좌 된 심정이에요. 아, 이 가시밭길... 여긴 좋으면 좋은대로 싫으면 싫은대로 찌질한 포스팅 밖엔 없을텐데 괜찮으시겠어요? 해리포터 앞에 선 삼류 흑마술사 마냥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Commented by 새러 at 2008/07/08 17:37
이미 습관화 된 '은지원'검색으로 와서 글 잘 읽고 갑니다.
10년 넘게 한 사람의 팬(이 용어가 맞긴 한건지;;)으로 지낸다는 게 생각하는 부분들에 있어서 여러가지 공통점을 심어주는 것 같아요, 제 개인적인 견해긴 하지만..예전엔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어서 계속 좋아하는건가봐-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미 여러 차례 실망, 또 좌절을 느꼈음에도 좋아하는 마음은 떨쳐지지가 않네요. 10년이 넘어도 이런 감정은 대체 무슨 단어로 표현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알고 계신가요?^^
라임콕님 글에 콕 빠졌다가 가요..가끔씩 눈팅하고 갈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어요?
Commented by 라임콕 at 2008/07/08 18:28
저도 제1습관이 은지원 검색이에요. 저도 무려 2세기에 걸쳐 실망하고 떠났다가 또 돌아오고 무슨 사춘기 가출 청소년도 아니고 뭐. 이젠 그냥 좋을 때 실컷 즐기다가 아니다 싶으면 또 훌쩍 떠났다가 그러려고요. 내가 의리 지킨다고 더 오래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은 은지원 맘에 달린 거니까 은지원도 그 바닥에 마음 떠나면 훌쩍 떠나라고 그래야죠... 라고 말은 하지만 역시 보고 싶겠죠 그립겠죠 하지만 살 순 있겠죠(아 이러려던 게 아닌데 참)

전 주성분이 콜라라 좀 끈적끈적해요. 인생에 도움 안되는 정크푸드니까 살짝 발만 담그세요 헤헤.
Commented by ㅇㅇ at 2014/01/20 12:41
라임콕님 보고싶다 요즘 지니어스땜에 난리난리라서 간만에 검색으로 들어왔는데 이글은 평생박제해줘요 라임콕님 어디메 계실까 ㅜㅜ
Commented by ㅇㅇ at 2016/06/27 02:02
아아 최근에 입덕한 사람입니다..이렇게 제 안의 은지원을 잘 표현한 글이 있다는것에 감동받았어요ㅠㅠ 권의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이고 모럴없는데 솔직하고 안그럴것같지만 상냥하고 허세가 없죠. 막 이사람이 천사라서 대단해서 좋아한다기보다 이제 그냥 내 안에서 인간적인 사람으로 자리잡은것 같아요.. 폐업하셨지만 정말 이만큼 마음에 드는 글이 없네요ㅠㅠㅠ잘읽고갑니다.
Commented by ㅇㅇ at 2018/10/25 15:18
안녕하세요 지원오빠 친친시절 사진 찾으려고 구글에 기간검색했다가 타고타고 블로그 구경하게 됐어요. 블로그 글들 너무너무 잘 읽고 있어요..! 글 너무 잘 쓰십니다 ㅜ_ㅜ 저도 오빠에게 뒤늦게 입덕했는데 입덕하고 나니 별의 별일들 다 있어도 미우나 고우나 이제 그냥 내 연예인이구나 싶단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고작 3년이 안됐는데도요. 근데 다른 팬분들도 비슷한 감정이신 것 같아서 신기해요. 오빠가 그만큼 그저 티비 속 연예인이 아닌 인간적으로 호감을 느끼게 하는 힘이 있어서 일까요? 저는 뚱냥시절ㅋㅋ 오빠를 알고 있던 상태에서 한참 뒤에 입덕한 애라 제가 보는 오빠의 현재는 늘 새롭고 또 그런 모습을 보여주려고 묵묵히 열심인 분이시거든요. 늘 최후의 1인이 되겠다 다짐하며 덕질 중인데.. 언젠가 오빠에게 기대할 것이 없을 때가 저에게도 오겠죠? 그 땐 라임콕님의 이 글에 더 공감할 수 있으려나요ㅠ 까마득해 보이지만 괜히 두렵네요..! 이 글을 쓰신 후에 10년 동안 지원오빠 큰 일 여러번 겪었는데(좋든 안좋든) 그 시간을 함께 겪었던 라임콕님은 어떤 생각이셨는지도 궁금하네요 ㅜㅜ 어디선가 잘 지내고 계신지.. 최근에 열렸던 콘서트 장에서 한 번은 스친 사이였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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